▒▒ 청 량 사 ▒▒
홈으로가기 메일보내기 사이트 맵
홈 > 역사와문화 > 유불선의역사가깃든소금강청량산
청량산의 전설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13920
홈페이지 : --
첨부파일 : 없음


11. 청량산의 전설


청량봉녀와 김생의 전설


청량산 금탑봉 좌측 계곡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약 10m 되는 직각암벽에 도착하게 된다.
암벽 밑에는 움푹하게 들어간 굴이 있어
이곳을 김생굴이라 부르는데 비가오면 굴 앞으로
빗물이 떨어져 마치 폭포를 연상케 하며
폭포 이름은 김생폭포라고 한다.
김생이 서도를 닦던 이 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 때 김생이라는 사람이
서도(書道)를 닦기 위해
청량산 금탑봉 근처에 있는 굴로 들어갔다.
김생은 이 굴에서 9년여의 시간 동안 서도를 열심히 닦았다.
9년이 지나 이제 김생은 이만하면 자신이
명필이 되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고
산을 내려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느닷없이
한 젊은 여인이 김생 앞에 나타났다.
"도령이 이 산에서 서도를 닦은 것처럼
소녀도 길쌈을 수련해 왔사옵니다.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닦아 온 솜씨를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처음 보는 여인이 당돌하게 이런 제안을 하자
김생은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고 있던 터라
"좋소. 그럼 솜씨를 겨루어 봅시다." 하고 선뜻 수락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생과 여인은 굴속에서
불을 끄고 각자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켜고 살펴보니 여인이 짠 천은
올 하나 틀리지 않고 고르게 짜여졌는데
김생의 글씨는 여인의 천처럼 고르지 못했다.
여인은 웃으면서
'도령이 명필이 되셨다고 하더니
실력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군요.'하며
김생을 조롱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김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공부하여 십 년을 채운 후 세상에 나와서
명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과부(寡婦)가 많이 나는 명당(明堂)


옛날에 한 풍수가 하는 말이
'이 산은 명당이다. 묘를 쓰고 나면
높은 사람이 많이 날 것이다.
그러나 초년에 과부가 많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그곳에다가 묘를 썼다.
그 후 정말로 마을에 과부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과부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과부가 생길 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묘를 파기로 작정을 했다.
그 묘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마침 강에 도달하니
갑자기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났다.
불어난 물 때문에 강은 못 건넜고 묘도 파지 못했다.


청량산 건들바위(動風石)


옛날 한 스님이 마음에 드는 절터를
찾아 헤매다가 외청량산까지 오게 되었다.
스님은 청량산의 깊고 수려한 산세에 감탄하며
절을 지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남쪽으로는 훤히 터지고 뒤편으로는
숲이 우거진 넓은 터를 발견하였다.
밑으로는 깊은 바위 절벽이어서
더욱 사찰의 위엄에 걸맞은 아주 좋은 자리였다.


△응진전 뒤 바위 봉우리 꼭대기의 동풍석


스님은 좋은 자리를 발견하여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절을 지을 곳에 바위가 하나 있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절을 지으려면 바위를 치워야 할 것 같았다.
힘이 상당히 센 스님은 손쉽게 바위를 절벽 아래로 굴려 버렸다.
다음 날 스님은 절 지을 땅을 고르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런데 어제 분명히 절벽 밑으로 굴렸던 바위가 제자리에 와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스님은 바위와 그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바위 주변과 절벽에는 가마니를 깔고 돌을 끌어올린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스님은 절을 세우지 말라는 부처님의 계시로 알고 절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이 바위는 약간만 밀어도 건들건들거릴 뿐
절벽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밤중에 도깨비가 가마니를 깔고 끌어다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건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호랑이가 장가 보낸 효자(孝子)


옛날 낮에도 호랑이와 늑대가 개처럼 흔하게 다니고
수십 년이 가도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청량산 속에서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느라 묘지 곁에
움막을 치고 사는 이씨(李氏) 효자가 있었다.
이 효자는 봉화군 재산면 현동리 사람으로
형제는 한 명도 없고, 어머니 김씨는 7살 때 죽었으며
22세 되던 해 아버지마저 죽었다.
효자는 죽어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여
청량산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효자의 아버지가 죽은 지 반 년이 채 못 된
8월 중순 어느 날 우연히 알 수 없는 처녀 한 명이 와서
하룻밤을 쉬어 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효자는 사정이 딱해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난 때라 같은 방에서 잘 수가 없어,
자신은 부엌에서 자고 처녀는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가 며칠이 지나도 가지 않고 있으므로,
효자는 잠자리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처녀인지는 모르지만
이 깊은 산중에 남자 혼자 있는데, 벌써 사흘이 지났소.
먹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남녀가 유별하여 거처가 불편해서 하는 말인즉
처녀의 내력을 말해 주시오'라고 하니,
처녀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효자는 '그럼 사정이 저와 비슷하니 우리가
남매의 의를 정해서 한 집에서 불편 없이 지냅시다.'고 하였다.
효자와 처녀는 이처럼 약속을 하고
그날부터 처녀는 누이가 되고, 효자는 동생이 되어
한 방에서 불편 없이 친남매처럼 지내게 되었다.

서로의 어려운 점을 도와 가면서 살던 두 사람은
어언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대상(大祥)이 가까워 오는
3월 보름에 서로 집안 걱정을 하다가 이야기 끝에
효자의 장가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효자는 가난뱅이에다가 무식한 자기에게
시집올 여자가 없으니 도저히 장가들 가망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처녀는 자기가 어떻게든 중매를 서 볼 터이니
준비를 하라고 하고는 어딜 좀 다녀온다고 하고 길을 떠났다.

그때 재산면 현동에서 40여 리 떨어진
삼동(三同)이라는 동리에 서울에서 내려온
조 참봉(趙參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딸이 있어 마침
사방으로 혼처를 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조 참봉이 재산도 많고 해서
여간한 신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딸은 나이 19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조 참봉은 꿈을 꾸었는데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
'나는 청량산의 신령인데 딸을 재산 현동의
이 효자와 혼인을 시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참봉이 이 효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보면 알 것이다.'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참봉은 이튿날 부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참봉은 재산 현동으로 가서 이 효자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단 두 식구만 사는, 거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이 말을 하자 부인은 크게 놀라며 화를 내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다시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화를 내면서
만약에 혼인 시키지 않을 때는 큰 벌을 내릴 것이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부인은 참봉과 같은 꿈을 꾸었다.
참봉은 걱정이 되었지만 부인이 아주 강력하게
반대를 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우물쩍 주저앉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걱정만 하고 있던 참봉에게 다시 그 신령이 꿈에 나타났다.
신령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구나.
만일 내일이라도 혼인을 하겠다고 이 효자에게 편지를 전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재앙을 내려 이 효자보다도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경멸하니
내일 저녁에 호랑이를 보내 너희 집 소와 돼지를 죽여
내 말이 사실인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였다.
과연 이튿날 저녁에 큰 호랑이가 소와 돼지를 물어 죽이고 달아나니,
참봉 내외는 서로 어젯밤 꿈을 이야기하고는
바로 편지를 써서 청량산 이 효자에게로 보내었다.

한편 누이를 떠나보내고 며칠이 지난 뒤에
나무를 해 가지고 돌아온 이 효자는
누이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반가웠다.
'누님 어디 갔다가 이처럼 오래 되었습니까'하니
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이번에 가서
동생의 혼인을 정하고 오느라고 좀 오래 되었네.' 라고 하였다.
동생은 농담으로만 알고 같이 웃으면서
'누님도 딱하시오. 내가 장가를 들지 못하는 줄 알고
그렇게 나를 놀리지만 나는 장가들고 싶지 않아요.'하자
누이는 또 웃으면서 '그럼 며칠 지내보라.' 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튿날 사람이 찾아와 편지를 주면서
'삼동 조 참봉 댁의 혼인 편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효자는 조 참봉 댁에서 자기에게
혼인 편지를 줄 리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제 누이의 말이 떠올라 편지를 누이에게 보이니,
누이는 웃으며 내 말을 이젠 믿고 빨리 답장을 써 보내라고 하였다.
효자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전혀
당치도 않은 일이라 혼인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누이는 자신만 믿고 아무 걱정 말고 답장이나 써 보내라고 하여
효자는 결국 누이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답장을 받은 신부 집에서는
바로 혼인 날짜와 혼수를 보내왔다.
효자는 아버지의 제사를 마치고
초례(醮禮)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누이가 효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신령님의 명을 받고 온 사자인데
이제 기한이 다 되었으니 떠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절대 밖으로 나와서
가는 모습을 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효자는 누이가 떠날 때 따라가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효자는 이때까지 호랑이와 같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 동안의 정은 모두 없어지고 무서워서
초례를 치르고 산막을 떠나
처가 동네인 삼동으로 가서
참봉의 힘을 입어 잘 살았다고 한다.


△삼각우송


삼각우총(三角牛塚)



△유리보전 앞의 삼각우총과 삼각우송



삼각우총은 현재
청량사 유리보전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사찰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원효 대사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진력을 쏟고 있을 때
하루는 사하촌(寺下村)에 내려가게 되었다.
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논에서
일을 하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마침 농부가 뿔이 셋이나 달린
소를 데리고 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뿔 셋 달린 소는 도대체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에 원효 대사가 농부에게
이 소를 시주하여 줄 것을 권유했더니
농부는 흔쾌히 이 뿔 셋 달린 소를 시주했다.
이에 원효 대사는 소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이 소는 절에 온 후 고분고분해지더니
청량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재목이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밤낮없이 운반하더니
준공을 하루 남겨 놓고 생(生)을 마쳤는데
이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이 소를 지금의 삼각우송 자리에 묻었는데
그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후세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
이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다.

이 밖에도 이 소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 전해져 오는데
청량사 아랫마을 '남민'(南敏)이라는 사람이
소를 절에 시주했다는 이야기와 회령부사로
유씨(柳氏) 성을 가진 이가 소를 절에 시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턱걸바위의 겨울

월명담(月明潭)과 개(犬)의 피


청량산 가는 길에
깊은 소(沼)가 있는데 '월명담'이라고 한다.
날씨가 가물 때에는
개를 잡아 피를 흘린 채 소에 넣는다.
그 까닭은 이 소의 수신(水神)은
개를 매우 싫어하여
개피가 흘러 들어오면
그것을 씻기 위하여
비를 내리기 때문이라고 전하며
지금도 '비나리'라 부르는 자연 부락이 있다.


관창리(觀漲里)의 임장군(林將軍)


| 글쓴 날짜 | 2005-06-30 |
 
이전 글   해당 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 글   '청량취소도(淸凉吹簫圖)'와 단원 김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