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가는 날
달력을 떼면서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장
교무실 유리창으로 비친 겨울나무에 메달린 마지막 잎새 처럼
세월이 무상하고 아쉽다.
적요한 겨울 산길따라 오체투지로 기어왔지만
산문(山門)이 그 길 뚝, 멈추게 한 뒤
내 신발 밑에 숨어 따라온 저잣거리의 노랫소리
소매 끝에 슬쩍 묻어온 달콤한 음식냄새
휙휙 단칼에 끊어버린다…겨울공부하러 왔습니다,
인사하고 선방(禪房) 계단 오르는데
네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돌계단이 금강(金剛)의 손바닥을 펴고
내 두 뺨 철썩철썩 사정 없이 두들겨 팬다…
(정일근 ‘내 마음의 동안거’에서)
올해는 윤달이 들어 음력이 늦다. 음력 10월 보름, 양력 12월 5일은 동안거 결제일結制日이다.
전국의 산사(山寺)와 선방, 토굴에 마음 푸른 수행자들이 바랑 하나 메고 찾아든다.
큰 스님들로부터 화두(話頭)를 받아 들고서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다.
네 본성을 찾아 나서라는 ‘이 뭣고’ ‘무(無)’‘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나는 어디서 왔는가)’
같은 화두들이다.
수행자들은 해제일인 정월 보름까지 석 달 동안 틀어박혀 참선수행에 몰두한다.
동안거는 산사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평화로워 보이지만 내면은 처절하도록 치열하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거든 조사를 죽여라”라는
임제 선사의 가르침처럼 미망(迷妄)과 번뇌와의 싸움은 육신을 박제하듯 고통스럽다.
머리카락과 발톱까지 저려오고 수마(睡魔)가 온몸의 땀구멍으로 쳐들어 온다.
화두는 여우처럼 놀리며 달아난다.
큰 대 자로 누우면 고통에서 해방되지만 그걸로 만사휴의(萬事休矣)다.
초조 달마는 9년 면벽 끝에 팔둑을 잘라 바치는 제자 혜가를 만났다.
성철 스님은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은 채로 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행했다.
그러고도 매년 두 차례 안거는 아예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으로 지났다.
철저히 고독해 봐야 참 자아(眞我)를 볼 수 있다지만,
우리 같은 속인들이라 해서 정일근의 시처럼 마음의 동안거를 못 할 건 없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가든 머물든 앉든 눕든, 지금 내 있는 곳을 선방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며
화(火)를 끊어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겨울을 안온하게 사는 무심의 경지일 것이다.
겨울방학이 온다.
우리 선생님들에게는 매년 되풀이 되는 선물이자 동안거다.
시기도 기간도 비슷하다.
여름, 겨울 우리에게 다가오는 안거 기간을 헛되이 무심하게 보낼건가.
올 겨울 한 철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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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