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었을까?
은행잎이 단풍이 한창일 때 역광에 서면 나뭇잎을 햇살이 투과해 황홀한 빛이 되지요.
그 샛노란 빛 속에 서면 세상 모두가 찬란한 환상에 빠져들어 넋이 빠질 지경인 것을 경험하기 위해 해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를 찾던 곳이 있었답니다.
근 20년이 됐으니, 꽤 오랜 세월 그곳에서 단풍 맞이했나 봅니다.
그런데 3년 전 그 자리에 그 나무가 없어져 버렸어요.
텅 빈 자리는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얼굴 없는 바람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어져 눕혀진 나무가 난도질당한 상상을 하면서,
그 해 가을은 왜 그리도 아프고 쓸쓸하던지......
하오의 햇살을 받으며 팔랑팔랑 춤추던 황홀한 빛의 잔치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 후에도 해마다 이맘때면 잊지 못해 그 자리를 찾아 갔답니다.
금년에도 가고 말았지요.
뻔히 은행나무가 없는 줄 알면서도 거기를 찾아가는 것은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지만,
한참 동안 은행나무가 서 있던 곳을 응시하다 옵니다.
아름드리나무가 높이 치솟아 있었고, 무성한 잎은 더러 떨어져 마치 병아리무리가 널따란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따뜻한 온기마저 전해주던 기억이 새롭답니다,
아직 단풍든 잎이 무성한데도 내 시야를 다 가리고도 넉넉한 품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던 나무를 상상하다 옵니다.
아무리 단풍이 우거진 깊은 산이며, 만산에 단풍이 뒤덮은 곳이라 해도 그 은행나무 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 단풍은 아마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왠지 그렀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래야 할 것 같답니다.
그곳에 그 은행나무가 아직 서 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단정 짓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지만 베어져 버린 나무라서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리나 봅니다.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못 잊을 사람과 밀회를 즐겼던 장소는 더더욱 아닌 한적한 도로 옆에 서 있던 나무인데, 강열했던 느낌 때문에 그 느낌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찾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오후 2~3시쯤 그곳을 지나다 만나게 되었었답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그 나무를 지나가고 있었지요.
눈부신 빛의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급히 차를 세우고 잠시 방금 지나 온 환상의 세계는 무엇인가?
생각하다 차를 후진 시켰답니다.
그리고는, 그 빛의 중심에서 멍하니 넋이 빠져 버렸지요.
차에서 내려 선 발밑엔 수북이 쌓인 낙엽은 나무가 토해낸, 한 해 내내 내뱉지 못한 이야기를 밟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나무가 단풍이 드는 것은 해마다 한번, 나무가 속내를 드러내고 자기 말을 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계절과 태양이, 그리고 거기 있는 나와 소슬한 가을바람을 타고 내려오며 춤추는 순간에 낙엽이 몸짓으로 전하는 말. ‘드디어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 그러는 것 같았답니다.
나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때론 자연을 보면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지요.
나는 그 후 그림을 볼 때 듣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글을 읽을 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같기도 했었답니다.
음악을 들을 때, 음악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기 시작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깊은 속에서 그렇게 전해 오는데 그 느낌을 거부할 수 없는 걸 어찌합니까?
심연의 깊은 곳에서 그런다고 우러나오는데 어찌합니까?
그러면서 나는 나를 해부하려는 마음이 일기 시작했고, 내가 다 찾아내지 못한 나를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니 오늘은 접어두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렵니다.
아마 훗날, 내가 나를 찾아가려 한다는 말은 다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여하튼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나는 눈을 하나 더 갖게 된 계기가 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답니다.
계절 중 가을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기인 듯합니다.
인생이 언제나 가을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도 그래서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사람도 일생을 통해 가을과 같은 시기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억을 정리하여 갈무리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내 인생의 가을도 정중하게 맞이하고 싶어지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가을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어께 위에 올라탄 가을마저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계절이 가을입니다.
깊이, 너무 깊이 가을 속으로 들어 온 까닭일까요?
차라리 가을 길에서, 길을 잃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어버리고 싶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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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