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하나
겨울의 절집은 여느 계절보다 마음을 차분차분 가라앉게 하는 편안함이 있다.
지난 주 토요일 찾았던 경북 봉화의 청량사가 바로 그런 곳이다.
간밤에 초롱초롱한 별빛과 동무를 하다가 새벽녘 잠이 들었다 깨어난
절집의 아침은 눈이 내리고 있어 "정말로 꿈결같은 세상이 이런 거구나"하고
감탄사를 저절로 나오게 하였다. 겨울이 깊을 대로 깊었는데도
올 겨울은 변변한 눈 소식이 한번 없어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길이니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산문을 열어놓고 소담스럽게 눈꽃을 피운 절집의 정경은
거창하게 극락이나 해탈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아집이나 미련같은 건
눈보라에 훌훌 실어보낼 수 있었다.
바람의 소리를 빌어 노래하던 대나무도 차분차분 눈이 내려앉으니
노래를 멈추고 뗑그렁 뗑그렁 멀리 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풍경소리가
가슴으로 자꾸 안겨들었다.
법당에서 세어 나온 향연기가 싸륵싸륵 배어드는 요사채에서
그날따라 먹빛 옷이 너무 고와 보였던 스님과 하루 동행한 인연으로
맺은 벗들과 차를 마시며 내다보는 설경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고자
하기엔 나의 속이 너무 좁은 듯 하였다.
골기와 지붕마다 눈이 쌓여 기와골 이랑과 고랑의 경계가 없어지고
오층석탑의 층층마다 버섯코같은 귓마루의 선이 밋밋해져서 눈발 사이에서
가물거릴 뿐이다.
눈과 소나무는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법당 앞에 세 갈래 가지를 뻗고 서있는 삼각우총 소나무에 얹어진 눈은
왠지 금방이라도 가지가 휘어질 듯 무거워 보였다.
아마도 소나무는 자신의 전생이었을 삼각우에 대한 전설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절 근처에 살던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뿔이 세 개가 달리고
낙타만큼이나 크고 사나운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청량사 주지스님이
남민에게 이 소를 절에 시주하도록 권유해 스님은 삼각우를 몰고 와서
온순하게 길을 들여 장작과 식량을 운반하는 일을 시키다가 어느 날
이 삼각우가 죽자 절 입구에 묘를 만들어 주었고 그 자리에 소나무가
나게된 전설이다. 소나무는 그 옛 이야기를 떠올리며 눈 위에 전생의
무거움을 더하고 있는 듯도 싶었다.
소나무와 나의 생각이 전설에 미치는 사이에도 눈 내리는 절집의 아침엔
그렇게 눈이 내리는 대로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 풍경 둘
눈내리는 절집이 너무 좋아 아무리 더 머물고 싶어도 시간을 마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길에 서울로 돌아가는
길도 걱정이 되었다.
버스는 끊겼으나 다행히 택시가 있어 눈이 잦아들면 내려가라는 스님과
사람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발길을 아래로 돌렸다. 걱정 마시라고
말은 했지만 워낙에 길이 급경사라 "이 눈 속에 어찌 내려갈꼬" 하는
걱정이 앞을 막았다. 혹시 누가 올라오나 앞을 내려다보고,
누가 아니 내려오나 뒤를 돌아보아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5분쯤 걸어 내려왔을 즈음에 산으로 올라오는 중년의 부부가 있어
서로 조심하라고 반가이 인사를 하고 서로 엇갈렸다. 몇 걸음 올라가던
부부는 뒤돌아 서서 나를 향하여 "내려갈 길이 멉니다. 이주 멀어요"를
두 번이나 외쳤다. 내려가는 길을 걱정해주는 배려의 말이었는데
그 말에 순간 무슨 화두라도 잡은 듯이 가슴속이 찡해왔다.
절 입구까지 무사히 내려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눈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키가 큰 은사시나무나 아카시아나무, 상수리나무, 자잘한 잡목들이
무거운 눈을 가지에 얹고 온몸으로 무게를 힘겹게 감당하고 있었다.
눈은 아름답고 하얀 세상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눈의 이면에는 비정한
자연의 세계가 존재하여 자신을 누르는 무거운 눈을 나목들 자신만이
감당해야 하는 치열함으로 느끼며, 눈의 무게를 못 견디고 찢긴 가지를
옆나무에게 기대고 서 있는 나무가 아프게 보였다.
어디선가 "쩌어∼억"하고 가지 찢기는 소리가 적막한 산 속을 맴돌더니
한 움큼 슬픔을 자아냈다. 겨울 한가운데 벌거벗겨졌지만 산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의 삶이 비정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서울행 기차안에서는 종착역인 청량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거의
볼 수 없었기에 불과 몇 시간 전의 눈 내리던 산사에서의 일이
현실이 아닌 듯 아련하기만 하였다.
눈꽃이 활짝 피었던 산길, 나무장작 타는 연기와 냄새,
귓전에 맴돌던 풍경소리, 눈오는 산사의 정경, 어깨에 눈을 얹은
겨울 나무들의 생존의 치열함이 숨겨진 산, 그 곳에 하염없이 내리던
눈 속에 서있던 시간이 아직도 꿈결인 듯하다.
볍련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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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