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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애환이 깃든 산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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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애환이 깃든 산

자신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난 노국 공주를 그리워하다
부하의 손에 살해된 비운의 왕 공민왕.
그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애환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는 청량산.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이름이 높다.
홍건적이 고려를 두 번째로 침략했던 1361년(공민왕 10) 12월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해 노국 공주와 함께 청량산으로 피신했다가
다음 해인 1362년(공민왕 11) 2월 안동을 떠나게 된다고 《고려사》에서는 적고 있다


  △산성 내의 갈대 길

.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고려 왕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원나라 왕족이었던 노국 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한 뒤 스스로 고려인을 자처하며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자주 정책을 도왔다.
하지만 결혼 8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중신들의 간청으로 공민왕은 이제현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다.
이곳 청량사에 왔을 때가 결혼 생활 11년 즈음으로
노국 공주는 유리보전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응진전에서 16나한을 모시고 기도를 했다.
홍건적을 무찔러 달라는 것과 함께
아마도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개경으로 환도한 뒤 공주는 16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1365년 겨울 난산 끝에 숨지고 말았다.
공주가 죽은 이후 공민왕은 가슴에서
공주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귀족과 시녀들의 음란한 행위를 보는 관음증이나
동성애에 빠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묘역은 현재 개성시 증서면에 있다.

공민왕은 이곳 청량산으로 피난 오면서 숱한 전설을 남겼다.
1361년 10월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은
노국 공주를 데리고 이곳 청량산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들어갈 때
지금의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와 관창리를 연결하는
나분들(廣石)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공민왕은 말을 타고 건너고
노국 공주와 시녀들은 인근 부녀자들의 등을 딛고 건넜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놋다리밟기>의 시초이다.
이 놋다리밟기를 <기와밟기>라 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복원해야 할 유산이다.
공민왕은 이곳 청량산에 3개월여 동안 있으면서
<유리보전>의 현판을 썼으며 산성을 쌓는 등
홍건적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공민왕이 죄인들을 사형시킨 밀성대 등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지역 사람들이 공민왕 사당을 만들어
매년 정월과 칠월 보름(백중)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공민왕당의 공민왕 영정은 도난 당하고 위패만 남아 있다.


△오마도(五馬道, 말 5필이 한꺼번에 다닐 수 있었던 산길)

공민왕당과 부인당

공민왕당

공민왕 산성마을에 있는 <감광전(感曠殿)>은 공민왕을 모시는 당(堂)이며,
공민왕의 신위와 용 그림이 뒤에 그려져 있다.
제일(祭日)은 정월 15일과 7월 15일이다.
제의 순서는 산령각에 먼저 제를 올리고 난 다음 공민왕 신위에 올린다.
제례는 청량마을 주민들이 함께 올리지만
부정이 있는 자와 여자는 금기로 되어 있다.
옆의 산령각(山靈閣)은 산신을 모신 당이며
산신은 호랑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국가의 대란이나 혁명시 공민왕당이
요란스럽게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부인당

봉화군 명호면 북곡1리의 당(堂)으로
공민왕의 <부인당>이라고 하기도 하고 <딸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당은 산성마을의 <공민왕당>과는 달리 당집이 없고 <당나무>가 있다.
지난날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제일(祭日)은 음력 1월 15일이다.
이 밖에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도 <공민왕 부인당>이 자리잡고 있다.

        △산령각              △공민왕당(감광전)

△노국공주가 청량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물을 건널 떄 행했던 '놋다리밟기'

놋다리밟기

공민왕이 청량산에 들어갈 때 낙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때 교량이 없어서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이 나와 횡대로 늘어서서
허리를 엎드리게 한 후 왕비와 공주들이
부녀자들의 등을 디디고 강을 건너게 하였고,
왕은 다섯필의 말을 탄 기병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한다.
이때 공민왕이 건넌 곳을 나분들, 공민왕당으로 가는 절벽의 암대를 오마대(五馬臺),
공민왕이 거처하던 곳을 공민왕당(恭愍王堂)이라 했다.
또한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궁한 후, 매년 정월 보름날에
처녀들이 옷을 곱게 차려입고 한 줄 횡대로 늘어서서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굽혀 나란히 엎드리고,
칠보(七寶)단장한 귀부인(왕비와 공주를 뜻함)이
등 위에 올라서서 좌우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례로 등을 밟아 천천히 걸어 끝까지
강을 건너게 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다.
이 놋다리밟기는 구한말까지 정월에 진행되어
하나의 민속놀이로 이어져 왔었다.

| 글쓴 날짜 | 2005-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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