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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과 2성 4현(二聖 四賢)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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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청량산과 2성 4현(二聖 四賢)

청량산은 2성(二聖)인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
그리고 4현(四賢)인 김생,
최치원, 요극일,
영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원효 대사의 유적인 원효봉, 원효대, 원효암, 원효굴,
의상 대사의 유적인 의상봉, 의상암, 의상굴, 의상대
그리고 최치원 유적인 치원봉, 치원대, 치원암, 고운굴, 총명수, 안중암이 있고
요극일의 유적인 극일암, 영랑의 유적인 사신(捨身) 장소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김생의 유적으로는 김생굴, 김생폭포, 김생 필적 등이 남아 있다.


2성(二聖)
원효 대사(元曉大師, 617~686)

원효 대사의 속성은 설(薛). 법명은 원효.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으로
경북 경산 출생이며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재산을 불문(佛門)에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 : 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원효종(元曉宗)을 제창한 후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 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하며
《무애가(無顫歌)》를 지어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 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효 대사는 663년(문무왕 3) 이곳 청량산에 들어와 청량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며
그의 흔적으로는 원효봉, 원효대, 원효암, 원효굴, 연대사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원효 대사                      △의상 대사

의상 대사(義湘大師, 625~702)

의상 대사는 화엄종(華嚴宗)의 개조로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661년(문무왕 1) 해로(海路)로 당(唐)나라에 가서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더불어
화엄종을 연구하고 671년 귀국했다.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
해동(海東)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전국에 10여 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 일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오진(悟眞)·지통(知通)·표훈(表訓)·진정(眞定)·
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상십철(義湘十哲)'라 일컫는 10대덕(大德)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고려 숙종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등이 있다.
이곳 청량산에는 의상 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의상암, 의상봉(연화봉), 의상굴, 의상대 등이 그것이다.

4현(四賢)

최치원(崔致遠, 857~ ? )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자가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한 후
874년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餠)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다.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고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 시대에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 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청량산의 최치원 유적으로는
그가 공부하며 두던 바둑판이 있던 풍혈(風穴=독서대),
치원암, 치원대, 고운대, 고운굴 등이 있으며
안중사는 최치원의 밥을 지어 주던 노파의 소상을 모신 곳이기도 하다.

△ 최치원

김생(金生, 711~791)


김생은 일생을 서예에 바쳤으며,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동(海東)의 서성(書聖)'라 불렸다.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필적은 유일한 서첩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외에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국립중앙 박물관 내에 있는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에 전한다.
현재 청량산에는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하던 김생굴과 김생폭포,
김생이 붓을 씻었다는 우물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청량봉녀와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또한 청량산 연대사에 금으로 쓴 불경 40여 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없다.
《삼국사기》권48, 열전제 8 '김생조'에서는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그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또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의 시에도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산집(山室)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 년을 지났다"고 적고 있다.
또한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유청량산록'에는
"김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재산(지금의 봉화 재산면) 땅에서 태어나
이산(청량산)의 비폭굴(김생굴)에 들어가 글씨를 익혔는데
지금 그 필적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김생이 봉화 재산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김생과 그의 필적

김생필적(金生筆蹟)
1771년 이세택이 《청량지》를 편찬할 당시 연대사에는
금은으로 쓴 김생의 글씨로 된 불경 40여 권이 간직되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전설에 김생은 청량산 김생굴에서 여러가지 서체를 익혔는데
필획이 높은 바위와 봉우리를 다듬어 놓은 것 같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棲雲塔碑) 백월비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비(碑)로
김생의 글씨를 대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백월비는 김생의 필적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백월비는 태자사(太子寺)에 있었는데
태자사는 지금 안동시 도산면 태자동으로 지난날에는 봉화군 명호면이었다.
이 비는 고려 954년(광종5)에 세운 비로 태자사에서 영주로 왔다가
다시 1918년 서울 경복궁 근정전 화랑으로,
그 후 다시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낭공대사(朗空大師, 832-913) 백월비는 비록 집자이기는 하지만
김생의 글씨라는 점에서 소중한 유물이다.
김생의 진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비석이 현존함은 뜻 깊은 일이다.
요극일(姚克一, 생몰년 미상) 요극일은 신라 말기의 서예가로
구양순의 필법을 습득하여 필력이 힘찼으며
비록 김생을 따르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벼슬은 중사인(中舍人), 숭문대랑 겸
춘궁중사성신(崇文臺郞兼 春宮中事省臣), 시서학사(侍書學士) 등을 지냈다.
남긴 글씨로는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871)》,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871)》,
《삼랑사비(三郞寺碑) 》등이 있다.
요극일은 김생, 탄연과 더불어 해동 3대 명필로 꼽히는 인물이다.
청량산 치원암에 집을 지은 최치원에 뒤이어 요극일이 이곳 청량산에 찾아와
치원암 옆에 극일암(克一庵)을 짓고 이웃해 살았다.
지금 청량산에는 극일암의 유허지가 남아 있다.
영랑(永郞, 생몰년 미상) 영랑은 신라 효소왕 때의 사람으로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과 더불어 4선(四仙)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던 국선(國仙) 화랑이다.
영랑은 금강산 방면의 유오(遊娛)로 이름났다.
영랑의 속적은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 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 방면을 답사, 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랑의 낭도 가운데
진재(眞才)·번완(繁完) 등이 특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요극일 관련 유적은 극일암터가 전해져 오고 있지만
영랑과 관련된 유적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영랑은 청량산에 들어와 사신(捨身)을 하고
그 뼈를 금궤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향을 피우고 목욕하며 교화를 받았다.(영랑이 사신한 곳에서 샘물이 솟았다.)
사신공양이란 죽은 육신을 짐승들에게 먹이게 한 후
남은 뼈를 간추려서 장사지내는 것이다.

| 글쓴 날짜 | 2005-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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