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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청량산과 만나다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6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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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퇴계 이황 청량산과 만나다


해발 870m의 청량산은 외형상 그리 높지는 않으나
선비의 기품을 지닌 산으로
이 아담하고 단정한 모양을 선비들은 사랑했었다.
일찍이 신재 주세붕도 이 청량산을 보고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청량산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선비 같은 산,
선비의 산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안동 예안의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불과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명승지이다.

퇴계는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
이렇듯 청량산은 퇴계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513년 2월에 13세의 나이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偶, 1469~1517)가
조카와 사위 조효연(曺孝淵)"오언의(吳彦毅)와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숙부 송재는 이들에게 11편의 시(詩)를 지어 주었다.

△청량산속에 든 청량정사

학문하는 사람의 길 산 오르기와 같나니
깊고 얕음 잘 해내면 가고 옴도 미더우리
하물며 저 청량은 경치가 좋고 그윽하여
내 일찍 십 년간을 거기서 공부했지


내 놀던 발자취 눈에 삼삼 아른거려
너희들 보내면서 괜히 십절 시를 읊었네
이번에 가 수학하면 좋은 기록 갖고 오라
상자 속 옛 기록 찾아 전후 비교하리라

송재는 이렇듯 시(詩)를 주면서
퇴계 등에게 독서에 전념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학습장이었고
자신들의 수련장이었던
청량산과 퇴계와의 관계는 이때부터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후 퇴계는 1515년(15세) 되던 해 봄에
사형(四兄) 온계 해(瀣)와 함께 숙부 송재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했다.
1525년 25세에는 봄에 청량산에 입산하였는데
열흘 동안 눈바람이 세차 서울에 올라간 3째형을 그리며
2년 전 한강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맞으며 읊은 시
'풍설(風雪)'에 이어 시를 읊었다.

또한 이때 퇴계는 청량산 보문암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주자(朱子)의 '마상설(馬上雪)'에 운(韻)을 붙여 시를 읊었는데
지금 그 시(詩)는 전하지 않는다.
1528년 28세에는 '청량산 백운암기'를 지었다.

' 백운암기(白雲庵記)'는
절의 승려 도청(道淸)이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간략하게 절의 승경을 기록해 보냈다.
이후 청량산 백운암에다 선생의 '백운암기'를 새겨서
절간 벽에 걸어 두었다.
이때 퇴계는 주자가 사액(寺額)을 써 주지 않는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지켰다.

1552년 (52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발(淸凉山錄跋)'을 지었으며
1553년 (53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후발(淸凉山錄後跋)'의 제시(題詩)를 지었다.


반평생의 이 심장이 쇠와 같이 굳세지 못하여
선산에 묵은 빚을 오래도록 갚기 어렵도다
꿈에 혼이 다시 맑고 높음을 능멸히 알고
형체의 역은 이제 오히려 고운 향기를 떨어뜨리도다
이백(李白)은 광여산에 들어가 일조(日照)의 시를 읊었고
한유(韓愈)는 서악에 올라 하늘의 빛을 움직였도다
큰 책편을 어찌 다행히 보내 주심을 보게 되어
천 길 절벽에 도리어 함께 옷깃을 떨치는 것 같구려


퇴계는 이해 12월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와 '양생설후(養生說後)'에 처음으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號)를 쓰기 시작했다.

1555년 (55세) 11월에는
청량산에 와서 한 달간 머물러 있으면서
'십일월입청량산(十一月入淸凉山)'시 40구(句)를 읊었다.
퇴계는 요산요수(樂山樂水)에 대해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말은
산이 곧 어짐이고 물이 곧 슬기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과 산수의 성(性)이 같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어진 이는 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산을 좋아하고,
슬기있는 사람은 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비슷하다는 것은
어진 이와 슬기있는 이의 기상과 의사를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통하여 근본을 구하고
본보기의 극치를 삼으려는 것이지,
산과 물에서 어짐과 슬기를 구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내 마음에 어짐과 슬기의 내용이 가득차서
밖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요산요수」는 간절히 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연이 주는 인간에 대한 교육에 깊은 이해를 가졌다.
그래서 퇴계는 '독서는 유산(遊山)이고 유산은 독서이다'라고 평했다.


△청량정사(일명,오산당)
이때 퇴계는 40년 전 봄에
여러 형제가 숙부 송재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왔을 때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시를 읊어 조카와 손자에게 보였다.


청량사에서 모시고 놀던 옛일을 생각하니
두 갈래 땋았던 뿔(總角)이 이제는 백발이 되었구나
학등에는 몇 번이나 언덕과 계곡이 변함을 보았던고
남기신 시를 세 번 반복하니 눈물이 가로 흐르네.


거듭 산을 찾아와 오직 나의 사람됨을 깨달으니
물에 떠서 흘러가는 복숭아꽃은 몇 봄을 지났던고
너희들 무리 타년에 나의 감회를 알까 보냐
그 당시 나도 너희들 같은 소년의 몸이었으니


퇴계는 청량산에서 동짓날(冬至) 느낀 바가 있어 시 3수를 썼으며
청량산에서 유산(遊山)을 마치고
'유산서사십이수(遊山書事十二首)'를
운곡(雲谷)의 잡영운(雜詠韻)으로 읊었다.
이후에도 퇴계는 청량산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는데
1568년 (68세) 12월엔 청량산에 가서 유람한 꿈을 꾸고 시 2수를 읊기도 했다.


천석 연하 노는 일이 아직 식지 않았거늘
늙은 나이의 이 몸이 그릇 부귀의 꿈을 꾼단 말가
어찌 알았느냐 이 유선침을 베고서
가서 청량산의 복지산을 올라 갈 줄이야


이 몸이 저 시원한 열어구의 바람 타고
하룻밤 지난 사이 온 산천을 구경했네
늙은 중이 나에게 농가의 삿갓을 주면서
일찍이 돌아와서 들 늙은이 되길 권했네



퇴계는 평생 동안 수차에 걸쳐 청량산을 방문하여
학문을 닦고 산천을 노래했는데
모두 55편의 시와 하나의 발문, 하나의 기문이 전한다.
그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

퇴계는 주세붕의 《청량산록》에 쓴 발문을 통해
청량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리 거리에 있다.
나의 고장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5시가 되기 전에 산 중턱에 다다를 수 있다.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 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퇴계 이후 사람들이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또는 '유가(儒家)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퇴계는 그의 인격적 만남의 첫 스승이 송재였다면,
그의 분부로 만난 첫 자연이 청량산이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산행은 그에게 커다란 감동과
각오를 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청량산은 퇴계가 중년이 넘어서도 찾던 정신의 고향이고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학문의 성지(聖地)라고
여길 정도로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청량정사 옆의 고목

△청량산 입구 퇴계 이화의 시비

퇴계는 독서가 유산(遊山)이고 유산이 독서라고 하면서
정상을 향한 점진적이고 착실한 행보로 청량산을 유람했으며
꿈속에서조차 청량산을 유람하고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려는 마음가짐을 가다듬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청량산에 올라 독서에 빠졌던 퇴계.
그는 그곳에서 경전의 탐구 및 내면적 수신에 힘써
'퇴계성리학'을 완성했다.
청량산은 퇴계에 의해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고
퇴계학의 성지로 거듭 태어났다.

이후 청량산은 단순한 산행 코스가 아닌,
퇴계의 자취를 찾고 퇴계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장소로 인식되어
수많은 유학자들과 퇴계 문인들의 성지 순례적 탐방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청량정사 현판(해사 김성근의 글씨)

청량정사(淸凉精舍) :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44호(1991. 5. 14. 지정)


청량정사는 일명 '오산당'이라 하는데
경일봉 아래 김생굴 밑에 있으며
유리보전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다.
「오산당중건기(吾山堂重建記)」에 의하면
퇴계 이황이 공부하던 곳에
사림(士林)들의 합의로 1832년(순조32)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고,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 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放火)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이다.
청량정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
평면은 2칸 마루방을 두고 있는데
당은 오산당(吾山堂), 헌은 운서헌(雲棲軒),
요는 지숙요(止宿寮),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다.
현재 청량정사에는
'청량정사', '운서헌', '오산당', '지숙료'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이며
'송재 이우'의 시판도 함께 걸려 있다.

청량의진


청량의진은
1896년 1월 김도현, 유시연, 신형일, 이충언 등에 의해
청량정사에서 조직되어 청량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1896년 3월 상주 함창 태봉 전투에 연합의진으로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 청량의진은 의병장이 아닌 중군(中軍) 지휘하에 22명이 참여하였는데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산정(孤山亭)


고산정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세운 정자로
축융봉(祝融峯) 아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데,
이곳이 바로 도산구곡(陶山九曲)중
제8곡인 고산곡(高山曲)을 말한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오고 갈 때
여기에 자주 들려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 글쓴 날짜 | 2005-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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